목계별신제(牧溪別神祭)

 

김 영 진

<청주대학교 명예교수>

 

목계(牧溪)는 조선시대 충주 엄정면 산계리(山溪里)인데 1914년 군면폐합을 할 때 목계동(牧溪洞)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날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가 되었다. 지금의 목계리는 아랫말 고운말 구미 건너말 샛터 새장터 웃말 창말을 목계1구로, 안목계 중계 마산을 목계2구로 나누어져 있지만 옛날의 목계는 1구이고 그 중에서도 동계(東溪)인 건너말과 서계(西溪)인 웃말과 창말이 가장 오래된 마을이다.

그리고 지금 목계에서 소태로 가는 19번 국도의 강변도로 우측에 있는 높이 150

.6m의 봉지산 중턱에 ‘부흥당’이 있다. 이 부흥당은 장기덕의『중원향토기<2>(1979)에 ‘산제당(山祭堂)’이라 하였고 또 예성문화연구회 발행의『충주의 지명』(1997)에서도

부흥당 : 봉지산 중턱에 있는 산신당. 매년 정월에 이곳에서 목계대동계를 중심으 로 산신제를 올린다고 함

 

이라고 하여 ‘산신당(山神堂)’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부흥당은 본래 목계 선창가 벼랑에 있던 ‘서낭당’을 19번국도가 개설되면서 1972년 현재의 위치에 새로 옮겨 세운 것이다. 그리고 이 때 당집 안 벽 중앙에 서낭각씨 그림, 그 좌우에 산신도(山神圖)와 용신도(龍神圖)를 봉안하여 옛날부터 모시던 서낭신에 새로 산신과 용신을 추가한 복합신당으로 꾸미고 당집 문 위에 「復興堂」이란 현판을 달았다.< 사진 참조>

그러므로 부흥당을 산신당이라 하는 것은 선창가에 있던 서낭당을 봉지산으로 옮기면서 생긴 인식의 변화일 뿐 그 주신은 어디까지나 서낭신이다.

우리나라의 서낭신은 무당들이 낱가릿대(禾竿)에 지전(紙錢)을 달아 서낭신으로 받드는 경우도 있지만 민간에서 마을 어귀나 고개마루에 있는 큰나무 또는 원추형으로 쌓아놓은 돌무더기, 그리고 당집에 위패나 그림을 신체로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 개인적으로 치성을 드리는 경우도 있지만 동민들이 매년 일정한 시기에 집단적으로 동제를 지내는 것이 보편적이다.

옛날 목계나루 선창가 벼량에 있던 서낭당은 서낭신의 위패를 모셔놓은 당집이었다. 그리고 주민들이 매년 정기적으로 주민의 안녕과 마을의 번영을 기원하는 서낭제를 지냈다. 그러나 목계의 서낭제는 다른 서낭제처럼 유교식으로 동제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무당이 별신제로 지낸 것이 특징이다. 별신이란 뜻은

① 광명을 뜻하는 옛말 ‘’에 ‘신’을 합성했다는 설

② 평야지대의 야신(野神) 즉 벌판의 ‘벌신’에서 유래한다는 설

③ 배를 관활하는 선신(船神) 즉 ‘뱃신’에서 유래한다는 설

등 여러가지 가설이 있다. 그러나 이능화가

 

우리나라 옛 민속에 여러 곳의 시장과 도회지에서 봄 여름에 일정한 날을 정하여(3 일 또는 5) 서낭굿을 하였다. 사람들이 모여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해도 관청에서 이를 금하지 않았으니 이를 ‘별신(別神)’이라 하였다. 이는 ‘특별한 굿’을 줄인 말이다.

 

라 한 것처럼 ‘특별한 굿’, 즉 무당이 제사하는 큰 규모의 마을굿을 뜻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무당이 제사하는 큰 규모의 마을굿을 모두 별신제라 하니 강원 고성과 경북 양산의 동해안별신제(東海岸別神祭), 경남 거제의 남해안별신제(南海岸別神祭), 충남 부여의 은산별신제(恩山別神祭) 등이 바로 그 예이다.

그런데 목계별신제는 오늘날 전승되지 않는 옛날의 민속이다. 또 근원설화가 없어 언제 어떤 연유로 지내게 되었는지 그 유래는 알 수 없지만 그 형성배경은 목계의 인문지리학적 배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남한강변에 자리한 목계에는 옛날에 나루, 즉 목계나루(牧溪津)가 있었는데 이 목계나루는 육로와 수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즉 가까운 엄정 소태 산척은 물론, 멀리 원주와 제천에서 목계나루를 건너 장호원을 거쳐 서울로 가는 육로의 길목이었고 또 한강으로 충주와 서을을 오가는 배가 정박하는 수로의 중요한 나루였다.

그리고 목계나루 건너편에 있는 가흥역(可興驛) 가흥발참(可興撥站) 가흥창(可興倉)이 있는 큰 마을인 가흥이 있었다. 특히 가흥창은 고려시대 금천진(金遷津)에서 배를 띄워 서울로 옮길 세곡을 쌓아놓는 곳집인 경원창(慶原倉)과 덕흥창(德興倉)을 조선 세조 11(1465)에 가흥역 동쪽 2리로 옮긴 것인데 이 가흥창은 일명 좌수참창(左水站倉)으로 세곡을 운반하는 조선(漕船) 14척을 보유한 비교적 큰 조창(漕倉)이었다.

그러나 가흥창 북쪽 샛길에 가흥나루(可興津)가 있었지만 조선의 정박은 가능하였지만 수심이 얕아 세곡을 선적하기 어려워 장천의 목계나루룰 자주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충주목에서는 가흥나루나 가흥대로인 하담나루(荷潭津)보다 이 목계나루에 중시하여 진선(津船)을 두고 또 진부(津夫)에게는 부역을 면제하는 특혜를 주었다.

그리하여 목계에는 저자는 없었지만 상담(商談)을 주관하는 도가(都家)가 있었고 가흥처럼 닷새만큼 서는 정해진 장날은 없었어도 물길이 좋아 오가는 배가 많으면 한 달에 대여섯번 나루터에 장이 서고 주막마다 흥청거렸다. 그러나 물길이 나쁘면 달포가 넘도록 비린 자반 구경하기가 힘들 정도로 물길은 주민의 생활과 목계의 경기를 좌우하는 젓줄이었다.

그런데 목계하류에는 강바닥이 험하고 물살이 사나운 막희락탄(莫喜樂灘) 고유수탄(固有愁灘)이 있어 서울을 오가는 뱃꾼들은 이를 항상 두려워하고 뱃길의 안전을 근심하였다. 그리하여 목계의 나룻뱃꾼은 하담 강 가 두무소(斗潭)에 있는 용바위에서 개인적으로 용신제를 지냈으나 한강을 오가는 뱃꾼들은 목계서낭당에서 배의 안전한 운행을 빌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당집이 선창가 벼랑에 있어 뱃꾼들에게 용신당으로 인식 또는 이용되면서 합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 부흥당의 용신이 바로 그 잔존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한 배경에서 목계별신제는 마을의 번영을 염원하는 주민들의 적극적 신앙으로 형성되고 거기에 서울을 오가는 뱃군들의 필수적 참여로 오래동안 전승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옛날 목계별신제의 형태는 경기가 좋았던 시기에는 매년 정월 5일 당골무당이 광대(廣大)와 악사(樂士)를 데리고 목계에 와서 3일간 광대놀이를 하여 구경꾼을 모아 돈을 걷고 9일에는 무당들이 아침부터 가가호호를 돌아다니며 축원을 해 주고 돈과 곡식을 받아 제사비용를 마련하고 밤에는 도가(都家)집에 음식을 차려놓고 소위 ‘안반(案盤)굿’을 하는데 이것이 전야제(前夜祭)의 성격을 지닌다.

그리고 제삿날인 10일 아침에 무당들이 서낭당에서 서낭신을 신장대에 영신(迎神s)하여 선창가에 큰 나무를 세우고 떡 과일 밥을 차린 탁자 위에 신장대를 모셔놓고 여러 무당이 노래와 춤으로 신을 즐겁게 하는 별신굿을 며칠동안 한 뒤 신장대를 서낭당으로 가지고 가서 송신(送神)하였다. 이 때 목계를 오가는 상인이나 뱃꾼 그리고 다른 마을에서 구경 온 사람들이 복돈을 놓고 무당들에게 축원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육로의 발달로 수로의 이용이 줄어 목계의 경기가 나빠지면서는 제사비용의 염출이 어렵게 되자 서낭굿을 서낭당에서 하였는데 그것도 규모가 점차 작아져 1930년대 동회에서 정월 9일 밤에 다른 마을처럼 유교식 동제를 지내기로 결의하여 별신제가 폐지되었다.

그러다가 필자가 1974년 문화공보부가 전국민속종합조사 7차년도 사업으로 실시한 충북민속종합조사에 참여하여 목계 당고사를 조사하면서 박수형(. 당시 60)에게서 옛날 목계별신제에 대한 간략한 조사를 하고『충청북도지(1975)』에 시장제(市場祭)로 충주별신제를 언급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예총 충주지부장 김풍식의 요청을 받아 본격적인 조사를 거쳐 1977년 제7회 우륵문화제 행사의 하나로 목계에서 별신제를 재연하고 1984년에는 충주에서 개최된 제2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충북작품으로 출연하여 우수상을 받으면서 목계별신제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목계별신제를 우륵문화제로 재연할 때와 전국민속예술경연되회에 출연할 때에는 별신제에 뒷풀이로 줄다리기를 합성하여 민속예술작품으로 구성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강변 신청(神廳)으로 영신한 서낭신을 줄다리기를 한 뒤에 송신한 것인데 이것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연희하여야 하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 이루어진 불가피한 구성의 결과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목계별신제’와 ‘목계줄다리기’는 학술적으로 엄격히 구분되는 민속이다.

그리고 필자는 목계서낭당을 봉지산 중턱으로 옮기면서 당집에 ‘부흥당’이란 현판을 부친 것은 부근당(일명 부군당)의 영향으로 추정한 바 있다. 그것은 옛날 목계서낭당에 나무로 깍은 남근이 있었다는 이야기에 근거한다. 부근당은 홍봉한이 “우리나라 풍속에 도하 관부(官府)마다 수호신을 모신 작은 숲을 두고 그 사당에 지전을 걸고 부근(付根)이라 일컽는다.”고 하였고 이규경은 “부근은 송각씨가 실렸다고 하여 나무로 만든 남근을 달아놓아 지나치게 음란하였으나 지방 관아에서도 이를 숭상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남근을 모신 부근당은 서울과 경기지역에서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어 서울 경기와 교통이 빈번했던 목계인지라 부근당의 영향을 받아 서낭당에 남근이 걸렸을 것으로 보나 그 시기는 조선 후기로 추정된다. 그리고 목계를 오가는 서울 경기사람들이 목계서낭당에 걸린 남근을 보고 부근당이라 부르면서 이를 따라 목계에서도 부근당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더욱이 이능화는 송각씨를 시집 못가고 죽은 처녀귀신인 ‘손각씨(孫閣氏)’라 하였으나 송각씨를 서낭각씨로 풀이하여 남근을 바쳤다면 그 논리적 근거도 찾을 수 있다.

그러다가 서낭당을 옮기면서 주민들이 기억하는 옛날 목계의 영광(?)을 되살리고 싶은 소망으로 부근당과 발음이 비슷한 이름으로 부흥당(復興堂)이란 현판을 걸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것은 목계사람들이 강 건너 가금면 장천리 서낭당 거북바위의 머리가 목계를 향하고 있어 목계의 돈이 장천으로 간다고 거북머리를 돌려놓은 일로 보면 그 가능성에 더욱 믿음을 준다.

목계별신제는 『충북도지』나 『충주시지』『내고장 전통가꾸기』등에 수록되어 있으나 그 내용이 간략하고 김풍식의 「목계별신제 소고」(1981)라는 글이 있으나 수필에 지나지 않는다. 더우기 오늘날 전승되는 민속이 아니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목계별신제를 충주지방의 특징있는 민속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하고 그 다음에 사라진 민속에서 살아있는 민속으로 부활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은 충주시민의 관심과 노력에 달려있음을 강조해 둔다.